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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었던 아주 특별한 관계였던 메리와 엘리자베스 그 둘의 이야기를 담다.
영화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는 16세기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격동적인 삶과 '해가 지지 않는 대 영국'을 만든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의 정치적 공감과 갈등을 담아낸 드라마장르의 영화입니다. 1542년 12월 8일 스코틀랜드의 린리스고 궁전에서 태어난 메리는 그녀가 태어난 지 불과 6일 만에 아버지 제임스 2세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적법한 왕위 후계자이지만 너무 어렸던 메리는 어머니로 인한 섭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5살이 되던 해에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프랑스의 훌륭한 문화 경험하며 선진 교육을 받았고, 1558년, 15세의 나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자인 프랑수아 2세와 결혼을 하여 왕비가 됩니다. 이 결혼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동맹을 공고히 하고 가톨릭의 종교적 위치를 굳건히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프랑수아 2세가 젊은 나이에 죽게 되자, 사실상 프랑스 왕실과의 교류가 끊긴 메리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여왕이 되고자 하면서 영화는 시작합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가톨릭이 우세한 국가였지만, 존 녹스와 같은 개혁가들이 이끄는 개신교가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의 메리는 개신교를 품음으로써 종교적 신념과 다양성에 대한 관용을 베풀었지만,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긴장은 느슨해지는 것이 아닌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이는 그녀를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한 수류탄이 됩니다. 그녀가 냉정하게 쳐내지 못했던 선택들로 인한 정치적 관용은 다양한 파벌을 양성시키는 동시에 그들의 경쟁으로 인한 사건사고를 일으키게 만듭니다. 신하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며 격동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유럽의 정치적인 위험을 헤쳐나가기 위해 메리는 수많은 도전에 직면해야 했고, 잘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녀의 카리스마, 지성, 그리고 외교 능력은 강력한 인물들과 동맹을 맺을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동시에 그녀를 위협으로 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음모를 계획했고 그녀를 적대적으로 대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결혼 스캔들로 민심을 잃어가고,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거센 반대급부에 마주하던 메리는 1567년 그녀의 어린 아들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훗날 영국의 제임스 1세)를 위해 스코틀랜드 왕위를 포기하도록 강요받기에 이릅니다. 그녀는 친척인 엘리자베스 1세의 지원과 보호를 기대하면서 영국으로 후퇴하지만 여전히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메리를 엘리자베스보다 더 강력한 영국의 합법적인 여왕으로 여겼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그녀를 자신의 통치에 문제로 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고심에 찬 엘리자베스는 결국 그녀의 보호를 받고자 온 메리를 성에 가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1586년, 엘리자베스를 음해하려고 했던 배빙턴 사건에 메리가 연루되었다는 증거가 드러났게 되고, 이 폭로로 메리는 1587년 2월 8일 참수형에 처해집니다.
메리는 정치적 희생자였나.
프랑스의 프랑수아 2세가 죽은 후 1561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메리 스튜어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영화는 어쩌면 그녀가 정치적인 희생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로 접근합니다. 젊은 여왕이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종교적 압력으로 분열된 지역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되찾고 강화하려 할 때, 그녀의 정치적 도전, 전략적 결혼, 이복형제의 반역과 더불어 살해당하는 전남편에 이어 가장 가까운 수복으로부터 강제적 결혼을 당하기까지 비극적인 일들이 연달아서 일어납니다. 반면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두 여왕의 일생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며 정치적 행보 또한 대조적으로 묘사합니다. 젊고 아름다우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잉태한 메리를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결국엔 본인이 사랑하는 남자를 메리를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보내게 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천연두로 피부가 망가진 자신을 버리고 메리를 선택하게 될까 봐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메리는 엘리자베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본인이 선택한 남자, 단리경과 결혼을 하게 되나, 프랑스에서부터 데려온 수복 리치오와 남편이 불륜을 저지른 것에 분노하게 됩니다. 향락에만 관심 있는 남편은 메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단 하나, 아이를 갖게 해 주는 거였습니다. 다행히 잉태를 하고 아들을 낳게 된 메리는 과거 반역으로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이복형제를 살려준 대가를 뼈아프게 치르게 됩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는 구교와 신교의 갈등으로 인한 경쟁상대이나, 스코틀랜드와 영국 각각의 여왕으로써 서로를 가장 많이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메리여왕의 통치적 복잡함은 엘리자베스 1세와의 경쟁 또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생모 앤 불린 이 간통죄와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그녀의 위치가 공주에서 사생아로 강등된 까닭에, 메리의 외가 프랑스의 카톨 기즈 가문은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의 정통적인 후계자라 주장하게 됩니다. 다만 프랑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민중의 신임을 얻지 못했으며, 하나밖에 없는 아들 제임스의 강제 입양에 동의해야만 했던 그녀는 정치적 반대세력으로부터 쫓겨 나와 영국으로 피신해 앞날을 모색하게 됩니다. 하지만, 1587년 엘리자베스 여왕을 해하려 했다는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으며, 그 시기는 메리가 정당한 왕의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영국으로 피신해 온 지 20년째가 되던 해였습니다.
후대에 와서 엇갈린 평가를 받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스튜어트의 일생은 후대에게 다양한 해석과 문화적 표현에 영감을 주면서 역사에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습니다. 메리의 격동적인 통치는 정치적 계획, 종교적 갈등, 그리고 특정한 비극으로 특징지어졌고, 그녀를 역사에서 설득력 있고 논란이 많은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메리가 태어난 지 6일 만에 그녀의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고, 메리는 가장 어린 여왕이 됩니다. 그녀의 정치적인 동맹과 2번의 결혼, 구교과 신교의 갈등 및 민심을 잃어버린 후의 여정까지 격동적인 그녀의 삶은 후대에도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비록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아들 제임스 1세와 달리 교양이 있고 매력적이었으나 감정기복이 심하고 자제력을 잃어버리기도 했으므로 통치력과 정치력의 평가는 좋지 않았습니다. 신하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으며, 그녀를 예뻐한 시어머니 카트린의 출신을 평가절하하기도 했기에 정치적 식견이 부족하다는 평이 있습니다. 당대에는 미녀였으나 능력이 없는 군주로 평가받았던 반면, 현대에 와서는 종교 분쟁과 왕위갈등의 정치적 희생양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굴곡이 많은 실제 인물들이 늘 그렇듯이 그녀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작가, 펜, 영화 제작자들을 유혹할 것이며, 르네상스 시기 동안 권력, 성 역학, 종교적 압박의 복잡성에 대한 고려 하도록 할 것입니다. 논란이 많고 잡음이 많았던 통치에도 불구하고, 메리의 극적인 삶과 그녀의 사랑 그리고 권력에 대한 욕망은 그녀를 역사상 영원한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에게 권위 있는 위치에 있는 여성들이 직면했던 위험들과 과제를 상기시켜 주고, 한 나라의 왕비였으나 결국 본인의 나라에서 여왕이 된 서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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